공주가 정말 백제 웅진이었을까?

공주가 백제 웅진이었다는 통설은 무엇에 기대고 있을까. 이 글은 『삼국사』 판본의 한 글자를 따라 그 연결 근거를 검토한다.
오래된 역사와 좁은 영역
사람은 자라면서 시야가 넓어지고 경험이 쌓이면, 자신도 모르게 자기 삶을 더 긴 시간과 더 큰 공간의 흐름 속에서 이해하려 한다. 역사에 관심을 갖는 일이 인류 보편의 현상인 까닭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우리 역사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역사 자체에는 무관심한 사람이 적지 않다. 원인은 둘로 짐작한다. 하나는 사건의 유기적 이해보다 성적을 위한 암기에 기운 역사교육이고, 다른 하나는 근현대사를 둘러싼 지나친 정치적 갈등이다. 그러면서도 사극은 꾸준히 인기를 끈다. 역사를 소비하면서 역사에 무관심한 이율배반이다.
필자의 불만은 층위가 다르다. 아주 어려서부터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의 영역’에 위화감을 느꼈다. 오래된 역사와 좁은 영역이 도무지 조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6·25 직후 필자가 자라던 동네에는 이른바 지식인들이 모이는 허름한 장소가 있었다. 또래와 달리 필자는 그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기 좋아했는데, 역사가 화제에 오르면 대개 만주를 넘나드는 넓은 영역이 거론되었다. 반면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는 압록강과 두만강조차 넘지 못했다. 그 간극이 끝내 이해되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니 첫 역사 시간이 ‘우리 역사는 고난의 역사요, 축소의 역사요, 타락의 역사다’라는 규정으로 시작되었다. 충격이 커서 50년이 지나도록 또렷이 기억했는데, 이제 60년을 넘기니 정확한 표현은 희미해졌다. 낱말은 달랐을지 몰라도 그 취지만은 분명하다. 그 뒤 공학을 전공하고 무역업에 종사하며 역사를 잊고 살았다. 그러다 어느 날 스스로 역사를 파고들 계기가 생겼다.
일러두기: 이 글은 高句麗를 ‘고구리’, 高麗史를 ‘고리사’, 三國史記를 ‘『삼국사』’로 적는다. 앞의 둘은 당대 음가에 관한 필자의 판단이고, 삼국사는 고리사의 인종23년 기사에 명시된 서명과 表紙題(표지제; 겉표지에 적힌 서명)를 따른 것이다.
유물도 사서도, 배운 역사와 다르다
배운 역사와 실제 자료 사이의 거리는 생각보다 멀다. 사서의 일부는 번역조차 애매하고, 유물은 결정적 증거 없이 나라가 단정된다.
우리나라 대표 유물이라면 많은 이들이 금관을 떠올린다. 경상도에서 나왔다는 이유로 거의 반사적으로 ‘신라’ 유물이 된다. 그러나 新羅라는 국호가 명문으로 새겨진 금관을 보신 일이 있는지 묻고 싶다.
공주나 부여에서 나온 유물도 같은 방식으로 ‘백제’의 것이 된다. 다행히 공주 송산리 벽돌무덤에서는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年六十二歲(녕동대장군 백제 사마왕, 나이 62세)라는 지석이 나왔다. 무덤 주인이 스스로를 밝힌 드문 사례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한다. 이 지석은 무덤 주인이 누구인지는 말하지만, 그 무덤이 놓인 땅의 이름은 한 글자도 말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사마왕이 여기 묻혔다’는 사실과 ‘이곳이 백제의 웅진이다’는 명제는 별개다. 앞의 것은 지석이 증명하지만, 뒤의 것은 지석이 증명하지 않는다.
같은 자리에서 하나 더 짚는다. 지석은 이 무덤의 주인을 斯麻王(사마왕)이라 하였다. 사서를 검토하면 이 사마왕이 백제 무녕왕(武寧王)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지석 자체는 사마왕이라 했을 뿐이다. 지석이 말한 것과 사서로 추정한 것은 구분해서 적어야 하며, 발굴 보고서부터 개설서까지 이를 뭉뚱그려 ‘무녕왕릉’으로 단정해 온 것은 서술의 기율이 무너진 예다.
뒤의 명제를 떠받치는 것은 오직 문헌이다. 그 문헌이 실제로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지가 이 글의 주제다.
『삼국사』에 백제의 公州는 없다
결론부터 말한다. 흔히 ‘삼국사기’로 불리는 김부식의 『삼국사』에는 백제 지명으로서의 公州(공주)가 없다. 필자가 확인한 범위에서 『삼국사』 본문에 公州는 두 번 나오는데, 둘 다 백제와 무관하다.
권5 신라본기 제5, 태종무열왕 6년(659) 9월
9월에 하슬라주에서 흰 새를 바쳤다. 공주(公州) 기군(基郡)의 강에서 큰 물고기가 나와 죽었다. 길이가 100척이었는데, 그것을 먹은 사람은 죽었다.
권50 열전 제10, 궁예 — 효공왕 8년(904, 천우 원년)
가을 7월에 청주 인호 1,000을 옮겨 철원성에 들이고 서울로 삼았다. 상주 등 30여 주현을 쳐서 차지하였다. 공주장군 홍기(弘奇)가 와서 항복하였다.
앞의 기사는 백제가 멸망하기 한 해 전인 659년의 신라 기록이고, 뒤의 기사는 백제가 사라진 지 240여 년 뒤 궁예 시대의 기록이다. 백제본기 여섯 권(권23~권28) 어디에도 公州는 없다.
지리지에 웅주와 공주를 잇는 듯한 구절이 하나 있기는 하다. 그 한 구절이 이 글의 핵심이므로 뒤에서 따로 다룬다.
백제의 도읍 네 곳
『삼국사』 백제본기에 따르면 백제는 678년 동안 세 차례 도읍을 옮겼으니, 도읍은 모두 네 곳이다. 그런데 그 네 곳의 이름조차 책 안에서 서로 어긋난다.
권23 백제본기 제1, 온조왕
(기원전 18) 마침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중략)… 온조는 강 남쪽 위례성에 도읍하였다.
14년(기원전 5) 봄 정월에 도읍을 옮겼다. …(중략)… 가을 7월에 한강 서북쪽에 성을 쌓고 한성의 백성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원문은 ‘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천도’라고만 했다. 뒤 문장에 ‘한성’이 나오므로 옮겨 간 곳이 한성이리라 짐작할 뿐, 명시된 바 없다.
권24 백제본기 제2, 근초고왕
26년(371) 고구리가 군사를 일으켜 왔다. 왕이 듣고 군사를 패하 가에 매복시켜 그들이 이르기를 기다렸다가 급히 치니 고구려 군사가 패배하였다. 도읍을 漢山(한산)으로 옮겼다.
여기서도 ‘한성’이 아니라 ‘한산’이다. 그런데 권37 지리4는 위례성에 389년, 근초고왕이 고구리의 남평양을 빼앗고 한성에 도읍하여 105년, 문주왕이 웅천으로 옮겨 63년, 성왕이 사비로 옮겨 122년이라 하였다. 본기는 한산, 지리지는 한성이다.
권26 백제본기 제4, 문주왕
원년(475) 겨울 10월에 도읍을 웅진으로 옮겼다.
권26 백제본기 제4, 성왕
16년(538) 봄에 도읍을 사비[소부리라고도 한다]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하였다.
정리하면 위례성 ⇨ 한성(혹은 한산) ⇨ 웅진 ⇨ 사비다. 그런데 같은 책 지리지는 문주왕이 옮겨 간 곳을 웅진이 아니라 웅천이라 적었다. 도읍 이름이 두 자리에서 어긋나는 셈이다.
웅진·웅천·웅주 — 셋인가 하나인가
세 이름의 출현 빈도가 고르지 않다. 필자가 세어 본 바로는 사비 21회, 웅천 32회, 웅주 8회, 웅진 61회다. (셈의 기준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실린 『삼국사』 원문 전체다. 독자께서 직접 세어 확인하시기를 권한다.)
비중이 이상하다. 사비는 122년 동안 도읍이었고 웅진은 63년이었는데, 정작 웅진이 사비보다 세 배 가까이 자주 나온다. 그러면서도 웅진과 웅천이 같은 곳인지 다른 곳인지는 원문만으로 확정되지 않는다.
신라 쪽 기록은 이렇다.
권8 신라본기 제8, 신문왕 6년(686) 2월
사비주를 군으로 삼고, 웅천군을 주로 삼았다.
권9 신라본기 제9, 경덕왕 16년(757) 12월
웅천주를 웅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3군 29현을 거느리게 하였다.
권34 잡지 제3, 지리1
於故百濟國界 置三州. 百濟故城北熊津口曰熊州, 次西南曰全州, 次南曰武州.
옛 백제 영역 안에 3주를 두었다. 백제 옛 성의 북쪽 웅진 어귀를 웅주라 하고, 그 다음 서남쪽을 전주, 그 다음 남쪽을 무주라 하였다.
신라의 계보는 웅천군 ⇨ 웅천주 ⇨ 웅주로 이어진다. 반면 백제의 도읍은 본기에서 줄곧 웅진이었다. ‘웅진과 웅천은 같은 곳’이라고 못 박은 문장은 『삼국사』 어디에도 없다. 권34의 ‘웅진 어귀’라는 표현은 웅주가 웅진 근처였음을 시사하지만, 웅진 자체가 곧 웅주라고는 하지 않았다.
유일한 연결 고리, 그런데 公州가 아니라 分州
웅주와 오늘의 공주를 잇는 고리는 『삼국사』 안에 단 한 곳뿐이다. 권36 잡지 제5 지리3의 웅주 조다.
熊州 本百濟舊都. 唐高宗遣蘇定方平之, 置熊津都督府. 羅文武王取其地有之. 神文王改爲熊川州, 置都督. 景德王十六年 改名熊州. 今分州. 領縣二.
웅주는 본래 백제의 옛 도읍이었다. 당 고종이 소정방을 보내어 평정하고 웅진도독부를 두었다. 신라 문무왕이 그 땅을 빼앗아 차지하였다. 신문왕이 웅천주로 고치고 도독을 두었다. 경덕왕 16년(757)에 웅주로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리)의 분주(分州)다. 거느리는 현은 둘이다.
이 한 구절이 웅진 ⇨ 웅천주 ⇨ 웅주 ⇨ ‘지금’을 한 줄로 꿰는 유일한 문장이다. 백제 도읍에서 오늘의 지명까지 이어지는 사슬 전체가 이 문장 하나에 매달려 있다.
그런데 그 ‘지금’이 公州가 아니라 分州다.
오늘날 통용되는 활자본과 번역본은 거의 예외 없이 이 대목을 ‘今公州’로 새긴다. 分과 公은 자형(字形)이 닮았으니 판독이 갈릴 수 있다. 판독이 갈리는 것 자체는 흠이 아니다. 문제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는 원문을 分州로 판독했다. 그런데 같은 페이지의 국역은 公州다. 근거는 판본이 아니라 『고려사』다. 『삼국사』를 읽는 자리에서 왜 『고려사』가 판본을 이기는가.
사슬 전체를 지탱하는 글자라면, 그 한 글자에 관한 판독 근거를 그 시대의 자료에 따라 논리적으로 밝히는 것이 마땅하다.
두 국보본을 나란히 놓고 보면
현전하는 『삼국사』 완질본은 두 질뿐이며, 둘 다 2018년에 국보로 승격되었다.
| 판본 | 지정 | 간행 | 소장 | 상태 |
|---|---|---|---|---|
| 옥산서원본 | 국보 제322-1호 | 1573년(선조 6) 경주부 인출 | 경주 옥산서원 | 인쇄 상태가 깨끗하지 못함 |
| 정덕본 | 국보 제322-2호 | 1512년(중종 7) 경주부 간행 | 성암고서박물관 | 현전 중종조 간본 중 가장 선명함 |
두 본은 같은 계열의 목판에서 나왔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는 『삼국사』 본문은 대체로 옥산서원본을 저본으로 삼는다. 두 본 모두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원문 이미지가 공개되어 있다.

이 글의 삽화로 제시한 것이 그 웅주 조의 첫 면이다. 왼쪽이 옥산서원본, 오른쪽이 정덕본이다. 필자는 옥산서원을 방문하여 이 대목을 직접 관찰한 일이 있다.
「改名熊州今」 다음 행 첫 자를 보시기 바란다. 두 본 모두 八 아래가 厶(公)가 아니라 刀(分)다. 곧 이 글자는 목판에 새겨진 글자다. 어느 한 인본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옥산서원본은 먹이 무겁고 번져 있으나, 이는 그 글자만의 현상이 아니라 면 전체의 현상이다. 1573년 후쇄본이 마모된 판목에서 나온 결과로 설명된다. 개칠 여부를 따지려면 먹색과 지묵의 번짐 양상을 고배율로 살펴야 하며, 축소 도판으로 단정할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물음은 이렇게 놓인다. 현전하는 완질본 두 질이 모두 分으로 인쇄되어 있는데, 오늘날 통용되는 활자본과 번역본은 무슨 근거로 公이라 새기는가.
근거가 있다면 밝히면 된다. 없다면 판본대로 分으로 새기고 그 뜻을 따로 논해야 한다. 어느 쪽이든 아무 말 없이 바꿔 놓을 일은 아니다. 필자의 판독을 믿어 달라고 청하지 않는다. 두 이미지는 공개되어 있으니 독자께서 직접 확인해 보시기 바란다.
고리사 이후의 공주, 그리고 熊川連海
고리사(高麗史)는 태조 왕건이 웅천을 공주로 고쳤다고 하였다. 웅진이 아니다. 그리고 웅천이 웅진과 같은 곳인지는 앞서 보았듯 확정되지 않았다.
고리사의 공주는 상당히 큰 행정단위로 기록되어 있고, 이 기록은 『세종실록』 지리지로 잘 이어진다. 다만 『세종실록』 지리지의 충청도는 행정구역 변동이 복잡하여 갈피를 잡기 어렵다. 그렇더라도 공주는 계룡산과 함께 오늘의 공주로 이어지도록 설명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공주 역시 오늘의 공주임이 거의 확실하다.
그런데 승람은 공주의 형승(形勝)을 설명하면서 ‘熊川이 바다에 연하였다’고 적었다. 공주는 내륙인데 웅천이 바다에 닿는다니, 읽다가 머리가 띵해진다. 고리사에도,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승람의 다른 어느 대목에도 공주가 바다에 연하였다는 서술은 없다.
정리하면 이렇다. 고리 이후 오늘까지 공주의 연속성은 비교적 뚜렷하다. 문제는 그 위쪽이다. 고리의 공주에서 신라의 웅주로, 다시 백제의 웅진으로 거슬러 오르는 사슬이 『삼국사』 안에서 단 한 구절에 매달려 있고, 하필 그 한 구절의 글자가 흔들린다.
예상되는 반론
이 글에 나올 법한 반론을 미리 적어 둔다. 반론이 성립한다면 그때 물러서면 될 일이다.
첫째, 659년 기사의 ‘공주’는 소급 표기라는 반론. 김부식이 자기 시대의 지명으로 옛 기사를 적은 것이므로, 오히려 그곳이 백제 땅이었음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있을 수 있는 설명이다. 다만 그렇다면 왜 같은 책 백제본기 여섯 권에서는 단 한 번도 그렇게 적지 않았는지 설명되어야 한다. 소급 표기가 가능했다면 백제본기 쪽이 훨씬 자연스러운 자리다.
둘째, 웅주 조가 이미 ‘本百濟舊都’라 하였다는 반론. 옳은 지적이다. 웅주와 백제 옛 도읍의 연결은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글이 묻는 것은 그 연결이 아니라 그 다음 고리, 곧 ‘今□州’가 오늘의 어디인가이다. 그 글자가 分이면 사슬은 바로 거기서 끊긴다.
셋째, 分州라는 지명은 달리 확인되지 않으므로 公의 誤刻(오각)이거나 오독이라는 반론. 충분히 가능한 설명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밝히고 교감하면 된다. 필자가 문제 삼는 것은 판독의 결론이 아니라, 판독이 갈리는 자리를 아무 말 없이 지나가는 태도다.
넷째, 고리사 지리지가 공주의 연혁을 백제 웅천에서 끌어오지 않느냐는 반론. 그 조문의 원문을 글자 그대로 확인하는 일이 남아 있다. 고리사가 ‘熊州’를 고쳤다고 했는지 ‘熊川’을 고쳤다고 했는지에 따라 논의의 무게가 달라진다. 이 대목은 별고에서 다루겠다.
무엇을 밝혀야 하는가
필자는 의심한다. 웅진이든 웅주든 오늘의 공주로 이어지는 고리가 부실하다는 사실을 알고, 그 고리를 손대려 한 것은 아닐까. 웅주가 이 땅에 없었는데 있었다고 해야 했던 것은 아닐까.
의심은 의심일 뿐이다. 의심을 사실로 바꾸거나 기각하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
- 전사의 근거. 두 국보본이 모두 分으로 인쇄되어 있다. 활자본·번역본·데이터베이스가 公으로 새긴 근거를 밝힐 것. 교감한 것이라면 교감했다고 적으면 된다.
- 分州가 옳다면. 分州가 이 땅에서 언제 어떻게 公州로 바뀌었는지 밝힐 것.
- 公州가 옳다면. ‘판본에는 分으로 되어 있으나 公으로 읽는다’는 한 줄을 본문과 역주에 명시할 것.
셋 중 어느 것도 아직 되어 있지 않다. 국보로 지정된 사서의, 사슬 전체를 떠받치는 한 글자 문제다. 더 미룰 일이 아니라고 본다.
끝으로 한 가지를 예고해 둔다. 이 글은 한 글자를 다루었다. 그런데 같은 사서에 방향이 같은 사례가 또 있다. 권46 최치원전에 실린 「상대사시중장(上大師侍中狀)」의 幽燕齊魯가 幽薊齊魯로 되어 있는 대목이다. 한 글자라면 오각이나 오독으로 설명된다. 둘이 되고 셋이 되면 설명이 달라져야 한다. 다음 글에서 다루겠다.
korec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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