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은 땅에 붙어 있다 ― 웅진·백강·임존, 그리고 남제서의 태수들

백제 역사 지명의 위치를 확인하는 일은 사서에 기록된 지명과 오늘날의 지리적 위치가 실제로 이어지는지 검증하는 데서 시작한다.
앞선 역사지명 카테고리 첫 글에서 삼국사에는 백제의 수도였다고 가르치는 오늘날의 공주가 정말로 백제의 웅진인지 찾아보려다, 의외로 삼국사 자체에는 현재 공주라는 지명이 없었음을 밝혔다. 오히려 웅주를 바꾸어서 분주가 되었음을 알아내었다. 학교에서 배운 역사에 무엇인가 오류가 있음을 알려주는 하나의 단서이다.
웅천은 언제 공주가 되었나
그렇지만 고리사 권56 지리1에 공주 연혁이 있다. 이를 읽은 일부 사학자들은 이 지리지를 인용하여 고리 태조 왕건이 웅진을 공주로 바꾸었다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러면서도 왜 공주가 되었는가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우선 예의 고리사 지리지와, 조선조에서 어떻게 공주를 기록했는지 확인하고 진실에 다가가 보기로 하자. 고리사 지리지 원문부터 확인한다.
公州本百濟熊川, 文周王, 自漢城, 徙都之, 至聖王, 又移都南扶餘. 新羅與唐, 夾攻滅之, 唐置熊津都督府, 留兵鎭之. 唐師旣去, 新羅盡有其地. 神文王, 改爲熊川州, 置都督, 景德王, 又改熊州. 太祖二十三年, 更今名. 成宗二年, 初置十二牧, 州其一也.
공주(公州)는 본래 백제(百濟)의 웅천(熊川)으로, 문주왕이 한성(漢城)에서 옮겨와 도읍하였다. 성왕(聖王) 때에 이르러 다시 도읍을 남부여(南扶餘)로 옮겼다. 신라(新羅)와 당(唐)이 협공해 〈백제를〉 멸망시켰는데, 당이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고 군대를 잔류시켜 진압하였다. 당 군대가 돌아가자, 신라가 그 땅을 모두 차지하였다. 신문왕(神文王) 때 웅천주(熊川州)로 고치고 도독(都督)을 두었으며, 경덕왕(景德王) 때 또 웅주(熊州)로 고쳤다. 태조(太祖) 23년(940)에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다. 성종(成宗) 2년(983)에 처음으로 12목(牧)을 설치하였는데, 공주도 그 중의 하나였다.
세종실록지리지는 다음과 같다. 거의 고리사의 판박이 수준이다.
本百濟熊川。第二十二世文周王, 自漢城移都之, 歷六十三年, 至二十六世聖王, 又移都南扶餘。唐高宗遣蘇定方, 與新羅金庾信平百濟, 置熊津都督府, 留兵鎭之。唐師旣去, 新羅文武王盡有其地, 神文王改爲熊川州, 置都督。景德王改爲熊州。高麗太祖二十三年庚子, 改爲公州, 成宗二年癸未, 初置十二牧, 卽其一也.
본래 백제의 웅천(熊川)이다. 제22대 문주왕(文周王)이 한성(漢城)에서 이곳으로 옮겨 도읍한 지 63년을 지나서, 26대 성왕(聖王)이 또 도읍을 남부여(南扶餘)로 옮기었는데, 당(唐)나라 고종(高宗)이 소정방(蘇定方)을 보내어 신라의 김유신(金庾信)과 더불어 백제를 평정하고는,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고 군사를 머물러 두어 진압하였는데, 당나라 군사가 물러가매,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모두 그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신문왕(神文王)이 웅천주(熊川州)를 고쳐 도독(都督)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이 웅주(熊州)로 고쳤으며, 고리 태조(太祖) 23년 경자에 공주(公州)로 고쳤다. 성종(成宗) 2년 계미에 처음으로 12목(牧)을 두매, 곧 그 하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또한 그러하다.
本百濟熊川。文周王自北漢山城徙都之,至聖王移南扶餘。唐高宗遣蘇定方與新羅金庾信攻滅百濟,置熊津都督府,留兵鎭之。唐師旣去,新羅盡有其地。神文王改爲熊川州,置都督。景德王改熊州。高麗太祖二十三年改今名。成宗二年置牧。
본래 백제(百濟)의 웅천(熊川)으로 문주왕(文周王)이 북한산성(北漢山城)에서 이곳으로 옮겨 도읍하였다가 성왕(聖王)에 이르러 남부여(南扶餘)로 옮겼다. 당(唐)나라 고종(高宗)이 소정방(蘇定方)을 보내어 신라(新羅) 김유신(金庾信)과 백제를 공격하여 멸하고는,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어 군병을 주둔시켰는데, 당나라 군사가 철수하자 신라가 그 땅을 모두 점유하였다. 신문왕(神文王)이 웅천주(熊川州)로 고쳐 도독(都督)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이 웅주(熊州)로 고쳤고, 고리(高麗) 태조(太祖) 2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성종(成宗) 2년에 목(牧)을 두었다.
판박이 속에서 어긋나는 세 글자
세 기록을 나란히 놓고 보면 거의 한 사람이 베껴 쓴 듯하다. 그런데 바로 그 판박이 가운데 세 군데가 어긋난다. 베낀 것들 사이의 어긋남은 베낀 쪽의 사정을 드러내므로, 이 어긋남이 오히려 읽을 거리가 된다.
첫째, 문주왕이 떠나온 곳이다. 고리사와 세종실록지리지는 漢城(한성)이라 하였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만 北漢山城(북한산성)이라 하였다. 한 글자 더하고 덜한 차이가 아니라, 성의 이름 자체가 다르다. 삼국사 백제본기는 문주왕 원년조에 “移都於熊津(웅진으로 도읍을 옮겼다)”이라 적었을 뿐이고, 떠나온 곳을 北漢山城이라 적은 문구는 없다. 뒤에 편찬한 책이 앞의 책보다 더 자세해졌다면, 그 자세함은 사료에서 온 것이 아니라 편찬자의 머리에서 온 것이다. 북한산성은 그 머리가 이미 한 장소를 정해 놓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둘째, 세종실록지리지에만 있는 “歷六十三年(63년을 지나)”이다. 고리사에도,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없는 숫자다. 이것은 사서에서 옮긴 문장이 아니라 편찬자가 햇수를 세어 넣은 계산이다. 계산은 틀리지 않았을지 몰라도, 계산을 넣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연혁이 기록의 전승이 아니라 후대의 정리임을 말해 준다.
셋째, 가장 중요한 “更今名(지금 이름으로 고쳤다)”이다. 고리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모두 이렇게 적었다. 여기서 ‘지금 이름’은 편찬하던 그 시점의 이름이다. 즉 이 문장이 증언하는 바는 “940년에 公州라는 이름이 생겼다”가 아니라, “편찬할 당시 이 고을이 公州라 불리고 있었고, 그 이름이 태조 23년에 고쳐진 것이라고 편찬자가 적었다”는 데까지다. 세종실록지리지가 이것을 “改爲公州(공주로 고쳤다)”라고 바꾸어 적은 순간, 추정이 사실의 모양을 얻는다. 글자 몇으로 추정이 단정으로 바뀌는 자리를 우리는 여기서 눈으로 본다.
이쯤 되면 의심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고리사는 고리실록이 있었음에도 (후)조선이 건국되고 무려 60년이 걸려 문종 때 완성되고 단종 2년(1454)에 이르러서야 인쇄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성종 때 발행한 동국여지승람을 중종 때 보완하여 다시 편찬하여 ‘신증’이라는 접두어를 붙였다. 따라서 우리가 보는 ‘고리사’,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모두 조선조에서 편찬된 것을 볼 뿐이고 막상 고리시대의 자료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더욱이 우연인지 모르지만 分州(분주)라는 公州(공주)와 매우 비슷한 글자가 개입되어 있어 의심을 빚어내고 있음이 9월 1일 일자의 글이었다.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웅진이 되었든 웅천주가 되었든 공주와 연결고리는 없음이다.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한번 다루기로 하고 삼국시대와 그 이후 시대인 고리와 조선시대의 지명이 연결고리가 없다는 주제에 집중해 보자.
이 땅에 없는 지명, 저 땅에는 존재
이야기가 갑자기 달라지지만, 우리는 삼국사에 등장하는 숱한 지명을 이 땅에서 찾을 수 없어 삼국사에 기록된 사건, 예컨대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와 당나라의 전투현장을 전혀 재현할 수 없다. 또 임금성(우리는 王을 임금이라 말하지 왕검이라 하지 않음)은 물론 평양도, 웅진도 말만 무성할 뿐 유적은 없다. 심지어 신라의 도읍이었다는 금성인지 월성이 경주였다는데, 왕궁터조차 제대로 발굴된 적이 없어 확인할 수 없다.
좀 더 단도직입적으로 핵심을 찔러 말한다면, 삼국사의 지명이 지나에는 숱하게 남아 있는데, 왜 우리 땅으로 교육받은 압록강 두만강 이남의(필자는 압두남이라 함) 땅에는 없다. 기왕에 언급하던 웅진이 백제의 것이었으므로 백제의 지명, 그것도 신라와 당의 연합군을 대적하였던 전장을 먼저 기억해 본다. 즉 국가 멸망의 한이 서린 의자왕 20년(660)부터, 분국 같았던 왜에서 지원하러 왔던 배 400척이 불타면서 백제부흥의 꿈조차 깨진 663년까지 기록된 지명을 마디마디 묶어 나열한다. 대괄호는 하나의 국면이고, 둥근괄호 안은 그 국면의 주체나 움직임이다.
[神丘(신구; 소정방 직무), 嵎夷(우이; 김춘추 직무)] [(라당군 진격로)성산 → 덕물도] [고마미지현(유배처; 흥수의 방어 전략): 평원, 〈防唐〉백강(혹 기벌포), 〈抵新羅〉탄현(혹 침현)] [(라당군통과) 백강, 탄현] [(계백)황산 → 웅진구, 〈屯兵(둔병)〉→ (도성)]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덕안(이상 5도독부)]
[(백제부흥전: 복신+도침, 立풍왕) 주류성, (도성 포위), (대방-인궤벼슬), 웅진강구, (도성 포위 포기), (물러남)임존성, (신라군 귀환)]
[(金欽;김흠)고사, 갈령도]
[(熊津之東; 웅진의 동쪽) 지라성, 윤성, 대산, 사정. (복신의 방어)진현성] [치주, 청주, 래주, 해주(7천 병사 징발)] [가림성, 주류(백제군 소굴)] [(당 별장+부여융; 수군)웅진강 → 백강(당 장수+신라왕; 육군, 합군) → 주류성, 백강(왜 400척 불탐)] [임존(지수신 항전, 흑치상지 저항, 뒤에 항복)]
위 지명 가운데 우이, 평원, 황산, 동명, 덕안, 그리고 7천 병사를 징발한 치·청·래·해 네 주는 지나에 현존하는 위치가 알려져 있다. 그리고 ‘혹 침현’은 沈丘(침구; 현재 하남성 동부)라고 바뀌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면 열 곳을 알게 된다. 여기에 대산을 태산이라고 추정한다면 열한 곳은 된다. 같은 곳을 가리키는 이름과 되풀이된 이름을 하나로 묶으면 모두 스물일곱 곳이다. 그 가운데 열한 곳, 약 40%는 현존 지명과 대응하거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후보에 해당한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그 40%가 흩어진 모양새다. 한두 곳이 우연히 겹친 것이라면 우연이라 하겠으나, 치·청·래·해는 서로 이웃한 네 주이고, 평원과 청하도 이웃이며, 덕안과 동명도 한 묶음으로 읽힌다. 우연은 흩어지지만 지명 체계는 뭉쳐 있다. 아래 지도에서 그 뭉침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도 이것만으로 백제가 지나에 있었다는 사실을 믿기 미진하다면 다른 기록에 도움을 요청해야 하겠다.

남제서의 백제 기록이 무서워 찢어버렸나
요청할 기록은 동이전이다. 가장 명백한 자료의 하나를 들자면 ‘남제서 권58 열전39 만 동남이’를 들 수 있다.
『남제서』 권58 열전39 동남이·백제조
牟大又表曰 臣所遣行建威將軍、廣陽太守、兼長史臣高達,行建威將軍、朝鮮太守、兼司馬臣楊茂,行宣威將軍、兼參軍臣會邁等三人 ~ 達邊效夙著,勤勞公務,今假行龍驤將軍、帶方太守。茂志行清壹,公務不廢,今假行建威將軍、廣陵太守。邁執志周密,屢致勤效,今假行廣武將軍、清河太守 ~
모대가 또 다시 표문을 올려, 신이 파견한 ‘행건위장군 광양태수 겸 장사 신 고달’과 ‘행건위장군 조선태수 겸 사마 신 양무’와 ‘행선위장군 겸 참군 신 회매’ 등 3인은 ~ 달은 변경에서의 공적이 일찍부터 뚜렷하고 공무에 부지런하였으므로 이제 ‘가행용양장군 대방태수’라 하였고, 무는 마음과 행동이 맑고 한결같으며 공무를 항상 놓지 않았으므로 이제 ‘가행건위장군 광릉태수’라 하였으며, 매는 생각이 찬찬하고 빈틈이 없어서 여러 번 근무의 성과를 나타내었으므로 이제 ‘가행광무장군 청하태수’라 하였습니다.
이 문구가 눈에 쉽게 들어오지도 않고 또 다른 기록도 있어 한눈에 들어오도록 표로 나타내면 다음 표와 같다.
| 이름 | 기존 직책 | 새로운 직책 |
| 姐瑾 저근 | 寧朔將軍·面中王 영삭장군·면중왕 | 冠軍將軍·都將軍·都漢王 관군장군·도장군·도한왕 |
| 餘古 여고 | 建威將軍·八中侯 건위장군·팔중후 | 寧朔將軍·阿錯王 영삭장군·아착왕 |
| 餘歷 여력 | 建威將軍 건위장군 | 龍驤將軍·邁盧王 용양장군·매로왕 |
| 餘固 여고 | 廣武將軍 광무장군 | 建威將軍·弗斯侯 건위장군·불사후 |
| 高達 고달 | 建威將軍·廣陽太守·長史 건위장군·광양태수·장사 | 龍驤將軍·帶方太守 용양장군·대방태수 |
| 楊茂 양무 | 建威將軍·朝鮮太守·司馬 건위장군·조선태수·사마 | 建威將軍·廣陵太守 건위장군·광릉태수 |
| 會邁 회매 | 宣威將軍·參軍 선위장군·참군 | 廣武將軍·淸河太守 광무장군·청하태수 |
| 慕遺 모유 | 龍驤將軍·樂浪太守·長史 용양장군·낙랑태수·장사 | |
| 王茂 왕무 | 建武將軍·城陽太守·司馬 건무장군·성양태수·사마 | |
| 張塞 장새 | 參軍·振武將軍·朝鮮太守 참군·진무장군·조선태수 |
이밖에 行揚武將軍 陳明(행양무장군 진명)도 있으나 지명을 알 수 있는 태수직이 없고, 沙法名(사법명) 외의 세 명도 왕과 候(후)라는 고위직이지만 지명을 알 수 없어 빼고 열 명만 표로 정리했다.
‘면중’과 ‘도한’도 지명을 가리키는 명사일 터이지만 현재로는 알 수 없고, 위 목록에서 광양은 랑방시의 한 區(구), 광릉은 양주시의 구로 되어 있으며, 청하와 성양은 산동성에 현존하거나 지나에서 쉽게 추정이 가능한 지명들이다. 기타 낙랑, 대방, 조선이라는 지명은 현 북경에서 석가장 근처로 이어지는 태행산맥과 하북평원에 걸쳐 있는 지역으로 추정되는 지역으로 정확한 위치는 계속 다루어질 주제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 둘 것이 있다. 이 관작들은 백제가 스스로 임명하고(假行) 그것을 추인해 달라고 청한 것이며, 남제는 “詔可, 竝賜軍號”, 곧 그대로 윤허하였다. 임명하는 쪽이 백제이고 윤허하는 쪽이 남제라면, 태수의 이름으로 적힌 땅은 백제가 실제로 관할한다고 내세운 땅이다. 이름만 빌려 온 허울이라면 남제가 자기 영역 안의 광릉과 청하를 남에게 붙여 줄 까닭이 없다. 조선·낙랑·대방·광양·광릉·청하·성양이 한 왕의 신하 명단 안에 나란히 적혀 있다는 사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백제의 손이 닿은 범위는 압두남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
이 남제서 기록의 모대는 백제의 동성왕을 말하고, 그 재위년대는 서기 479년~501년이다. 이 남제서에 볼 수 있는 왕성한 국력이 삼국사에서 볼 수 없다 하더라도 계속 확장되었던 듯하지만, 이 땅에서는 확장할 공간이 없다. 그런 확장은 신라와 당에 위협이 되었을 것이어서, 앞서 인용하였던 백제가 라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았던 지역도 지나의 지역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판단된다.
앞의 백제가 라당연합군과 전투를 벌인 기록의 지명과, 남제서의 동성왕의 신하들을 배치한 지명을 함께 지도에 나타내보았다(머리의 대표이미지). 서울대 박창범 교수가 삼국사 기록으로 일식 최적관측지를 천문학적으로 추적한 위치와 크게 어긋나지 않다는 사실은 역사학의 지리비정이 얼마나 왜곡되었는지 알 수 있도록 알려준다. 다만 어긋남이 전혀 없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전쟁 기록의 지명은 산동성을 중심에 놓는데 일식 관측지는 하북성 북쪽으로 치우쳐, 두 자료는 겹치면서도 한쪽으로 밀려 있다. 둘 다 삼국사 한 책에서 나온 것이니 이 밀림 자체가 다음에 풀어야 할 과제다. 그러나 밀림의 폭이 수백 리라 하더라도, 그 수백 리는 모두 대륙 안쪽의 수백 리이지 압두남으로 건너오는 수천 리가 아니다.
이러한 기록이 얼마나 지나인들에게 충격이 되었는지, 고구리 뒷부분과 백제의 앞부분, 합쳐서 18줄(앞뒷면 각각 9줄, 18자/줄) 324자에 해당되는 한 장이 아예 찢겨 없어졌다. 불과 몇 곳의 지명만도 지나 대륙 평야지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엄청난 기록이니, 그보다 엄청난 사건이 기록되었으니 없앴을 것으로 추정해야 옳을 것이다. 찢긴 자리가 하필 고구리와 백제가 맞닿는 지점이라는 사실도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남은 종이는 말을 하지 않지만, 없어진 종이도 그 자리로 말을 한다.

요수는 요하가 아니다
이러한 증거로 볼 수 있듯, 역사 기록이 대략 이백 년 내외마다 발생한 격렬한 정권교체를 불러오는 전쟁으로 사라져 버린 사실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더 나쁜 사실은 복원한다는 미명 아래 새로운 국가탄생의 정당성을 만드는 수단으로 지난 시대의 기록을 변조하고, 지명을 바꾸므로 사람들의 기억을 혼란시켜온 사실이었다.
그 극단적인 예의 하나는 산서성 동남부의 요수를 요녕성의 요하로 바꾸므로 동이와 북적을 변방으로 완전히 밀어내는 일이었다. 결국 백제와 고구리는 거곶(현재 한국)과 만주의 일부를 차지한 국가로 규정하게 만들었다.
요수는 삼국지부터 당서까지 출현한다. 그 시기에는 요하라는 어휘가 전혀 쓰이지 않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요사에서부터 요하가 출현하여, 요사 이후 청사고까지 요수는 9회밖에 나오지 않는 반면 요하는 무려 98회 등장한다(필자 집계).
여기서 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요수에서 요하로 바뀐 것은 같은 물줄기의 이름이 바뀐 일이 아니라, 뒤에 생긴 이름이 앞 시대의 기록 위에 덧씌워진 일이다. 삼국지부터 당서까지의 사서가 요수라 적었을 때, 그 글을 쓴 사람의 머릿속에 요녕성의 물줄기는 들어 있지 않았다. 요하라는 이름은 그때 없었기 때문이다. 없던 이름을 가져다가 있던 이름의 자리에 앉히면, 그 사이에 벌어진 모든 사건의 무대가 통째로 옮겨 간다. 고구리와 수·당이 맞선 자리가 옮겨 가고, 그에 따라 백제도 신라도 함께 밀려난다. 지명 하나를 바꾸는 일이 어떻게 나라 하나를 옮겨 놓는가를 요수와 요하가 보여 준다.
다시 공주로
처음으로 돌아가자. 공주에는 웅진이 없었다. 삼국사에 공주라는 이름이 없고, 고리사·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은 모두 조선조의 붓으로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고 적었을 뿐이며, 그 세 기록마저 떠나온 성의 이름에서 서로 갈라진다. 연결고리가 있었다면 갈라질 까닭이 없다.
반대쪽은 어떠한가. 우이·평원·동명·덕안·청하·광양·광릉·성양·치주·청주·래주·해주는 지금도 그 자리에 존재하거나, 추적이 가능하다. 한쪽은 이름은 있으나 땅이 없고, 다른 한쪽은 땅이 있는데 우리가 그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다. 지명은 사람이 옮길 수 있어도 땅은 옮길 수 없다. 그렇다면 옮겨진 쪽이 무엇인지는 이미 답이 나와 있는 셈이다.
다음 글에서도 웅진과 웅주가 어떻게 구분될 수 있을지, 우리의 기록을 남긴 사서의 어떻게 남아 있는지 이어서 살피기로 한다.
인용 사료 및 참고자료
- 『三國史記』(삼국사), 백제본기·신라본기·지리지. 백제 멸망 전쟁과 관련 지명 기록.
- 『高麗史』(고리사), 권56 지리지1, 공주조.
- 『世宗實錄地理志』(세종실록지리지), 충청도 공주목조.
- 『新增東國輿地勝覽』(신증동국여지승람), 충청도 공주목조.
- 『南齊書』(남제서), 권58 열전39, 동남이·백제조. 동성왕의 관작 요청 및 남제의 승인 기록.
- 『동아시아 日蝕圖』 B.C. 800년부터 A.D. 2200년까지, 박창범, 1999, 11, 25, 서울대학교 출판부.
-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박창범, 2002, 11, 13, 김영사.
- 필자 제작 역사지명 대조 지도. 고대 사서의 지명과 현대 지명·지형 자료를 비교하여 작성.
korec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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