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고대 국가는 어디 있었는가
지난 글 끝에 웅진과 웅주를 어떻게 가를지 이어 쓰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막상 이으려니 나라의 영역이 정해지지 않은 자리에서 지명을 따지는 셈이어서 붓이 나가지 않았다. 웅진 이야기는 뒤로 미루고, 우리 고대 국가가 어디 있었는지부터 적는다.
학교에서 배운 역사지도는 늘 압두남(압록강·두만강 남쪽을 뜻하는 필자의 용어)에 작은 나라 하나를 그려 놓았고, (고)조선을 말할 때만 만주 한쪽을 겨우 보탰다. 어린 나이에도 세계지도 옆에 놓고 보면 위화감이 든다. 더 큰 문제는 그 좁은 땅이 교과서가 말하는 오천 년과 맞지 않는다는 데 있다. 시간은 길게 잡아 놓고 공간은 좁게 그려 놓았으니, 읽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어긋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영역은 어디서 확인하는가.
『삼국사』에는 영역이 적혀 있지 않다

우리 고대 역사는 누구나 알다시피 ‘삼국사‘가 유일하다. 그런데 그 ‘삼국사’를 제대로 읽어본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전문가조차 정독하지 않았을 것으로 확신한다. 만약 정독하였다면 오늘날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교과서를 만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인이 ‘삼국사’를 읽으려 해도 재미를 느낄 내용이 많지 않고, 이해하기 어렵거나 만족할 수 없어 완독을 포기하게 된다. 더 큰 요인은 재미를 느끼게 할 해설조차 부실하다는 데 있다. 이 또한 사학자들의 책임이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거짓 역사가 가능했던 더 근본적인 원인은 따로 있다. ‘삼국사’만으로는 그 영역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삼국사’는 임금의 즉위와 승하, 전쟁과 사신, 천재와 이변을 적되, 나라의 사방이 어디에 닿는다는 구절은 거의 적지 않았다. 기년과 사건은 있으나 경계가 없다. 그러니 영역은 다른 데서 확인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동이전을 읽는다
지나의 사서는 흔히 25사라고 한다. 그 가운데 사마천이 썼다는 ‘사기’, 반고가 지었다는 ‘한서’, 범엽이 저술하였다는 ‘후한서’, 그리고 진수가 썼는데 배송지가 주석을 달아 보충했다는 ‘삼국지‘를 前四史(전사사)라고 부르며 높이 평가한다.

이 가운데 ‘삼국지’의 기록 시점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삼국시대라면 220년부터 280년까지를 말하는데, 진수는 서진이 망하기도 전인 297년에 죽었다고 한다. 오나라가 망하기 전에 이미 위와 촉의 역사가 기술되었다는 말이 된다. 후한이 삼국시대보다 앞선 나라인데도 ‘삼국지’가 ‘후한서’보다 먼저 편찬된 까닭이 여기 있다. 따라서 우리 역사를 언급한 대목 또한 비교적 신선한 기록이라, ‘삼국지’가 자주 거론될 수밖에 없다.
다만 누락이 많다 하여 남조 송 때 배송지가 주를 달아 보충하였다는데, 그나마 원본은 볼 수 없고 남송본을 볼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하나 더 덧붙일 것은 소설 ‘삼국지’가 더 유명하다는 사실이다. 이 소설은 허풍이 많을 뿐더러 지명을 옮겨 놓은 대목이 적지 않아, 사서의 지명을 따지는 자리에서는 해악이 크다는 점을 미리 인지하여야 한다.
지나의 사서는 주변 국가를 모두 藩國(번국)으로 적는다. 그들의 역사를 깊이 알지 못하면서도 단 몇 줄이라도 적어 놓아야 한다고 여긴 듯하다. 그런데 그 몇 줄 되지 않는 기록 속에 『삼국사』에서 볼 수 없는 중요한 단편이 들어 있다. 번국으로 낮추어 적은 붓이 역설적으로 우리 영역의 뼈대를 남겨 놓은 셈이다.
아래 인용하는 문헌은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제75와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제30이다. 두 사서의 내용이 거의 같아 오늘날 말로 하면 베껴 붙인 수준이라 하겠으나, 정보가 하나라도 많은 쪽을 택하여 인용하였다. 국가 단위의 방향성을 적은 구절만 뽑는다.
동이전이 적어 놓은 방위
조목마다 한 줄씩 덧붙인다. 블록이 어느 쪽으로 놓이는지를 밝혀 두어야 나중에 쌓을 수 있기 때문이다.
夫餘國 在長城之北 在玄菟北千里. 南與高句驪 東與挹婁 西與鮮卑接 北有弱水.
부여국은 장성의 북쪽에 있는데 현토의 북쪽 천리에 있다. 남쪽은 고구리와, 동쪽은 읍루, 서쪽은 선비와 접해 있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
네 방향이 모두 적힌 드문 조목이다. 북쪽 한계는 약수, 서쪽 끝은 선비이니 블록의 위쪽 모서리가 여기서 정해진다. 동시에 장성과 현토가 어디냐는 물음을 남긴다.
挹婁 古肅慎之國也. 在夫餘東北千餘里 東濱大海 南與北沃沮接 不知其北所極.
읍루는 옛 숙신의 나라이다. 부여에서 동북쪽으로 천여 리 밖에 있는데, 동쪽은 대해에 닿고 남쪽은 북옥저와 접하였으며, 북쪽은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부여의 동북에 붙는다. 북쪽 끝을 모른다 하였으니 이 모서리는 닫히지 않고 열려 있다.
高句驪 在遼東之東千里. 南與朝鮮, 濊貊 東與沃沮 北與夫餘接. (都於丸都之下, 方可二千里, 戶三萬.)
고구리는 요동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과 예맥, 동쪽은 옥저, 북쪽은 부여와 닿아 있다. (환도 아래에 도읍하였는데 면적은 방 2천 리는 되고, 호수는 3만이다.)
부여 남쪽, 옥저 서쪽에 놓여 블록의 한가운데를 차지한다. 방 2천 리라는 크기까지 적혀 있어 다른 블록의 치수를 재는 자가 된다.
東沃沮在高句驪蓋馬大山之東. 東濱大海, 北與挹婁ㆍ夫餘, 南與濊貊接. 其地東西夾 南北長. 可折方千里.
동옥저는 고구리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동쪽은 큰 바닷가에 닿았으며, 북쪽은 읍루·부여, 남쪽은 예맥과 닿았다. 그 지형이 동서는 좁고 남북은 긴데, 면적은 사방 천리의 절반쯤 된다.
대해에 면한 좁고 긴 띠다. 동서가 좁다 하였으니 이 조목은 동쪽 바다의 위치를 고정시킨다.
濊北與高句驪沃沮, 南與辰韓接, 東窮大海, 西至樂浪. 濊及沃沮ㆍ句驪, 本皆朝鮮之地也.
예는 북쪽으로는 고구리·옥저와, 남쪽으로는 진한과 접해 있고, 동쪽은 대해에 닿으며, 서쪽은 낙랑에 이른다. 예 및 옥저·고구리는 본래 모두 옛 朝鮮의 지역이다.
동쪽 바다와 낙랑 사이를 메우는 블록이다. 뒤 문장이 더 중요하다. 예·옥저·고구리가 본래 모두 조선 땅이라 하였으니, 조선의 폭이 그 셋을 합한 만큼이었다는 말이 된다.
韓有三種: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
한은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진이다.
馬韓在西, 有五十四國. 其北與樂浪 其南界近倭. (韓在帶方之南.)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54국이 있다. 그 북쪽은 낙랑, 남쪽 경계는 왜에 가깝다.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다.)
한의 서쪽 끝 블록이다. 남쪽은 接이 아니라 近, 곧 맞닿았다가 아니라 가깝다고 적혀 있다. 경계선을 긋는 자리에서는 이 한 글자의 차이가 작지 않다.
辰韓在馬韓之東. 十有二國, 其北與濊貊接.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는데,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과 접하여 있다.
마한의 동편에 붙고 위로는 예맥에 닿는다. 예의 남쪽이 진한이라던 앞 조목과 맞물린다.
弁辰在辰韓之南, 亦十有二國, 其南亦與倭接.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삼한의 동남 모서리다. 여기서는 接을 썼다.
凡七十八國 伯濟是其一國焉. 大者萬餘戶, 小者數千家, 各在山海閒, 地合方四千餘里, 東西以海爲限, 皆古之辰國也. 馬韓最大 共立其種爲辰王 都目支國, 盡王三韓之地. 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한은 모두 78개 나라이고 伯濟는 그 가운데 한 나라다. 큰 나라는 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가인데, 각기 산과 바다 사이에 있어서 전체 국토의 넓이가 방 4천여 리나 된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경계로 하니 모두 옛 진국이다. 마한이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왕을 세워 진왕으로 삼고 목지국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 땅의 왕으로 군림하였다. 모든 국왕의 선조는 모두 마한 종족의 사람이다.
이 조목이 가장 무겁다. 삼한 전체가 방 4천여 리이고, 동쪽과 서쪽이 모두 바다라 하였다. 그 바다 사이에 78국이 들어앉는다. 백제가 아직 78국 가운데 하나로 적힌 시점의 기록이기도 하다.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 依山㠀爲居 凡百餘國.
왜는 대방의 동남쪽 대해 가운데 있고, 산과 섬에 의지하여 살았는데, 무릇 100여 나라이다.
삼한의 남쪽 바깥을 닫는다. ‘삼국지’에는 왜의 나라들 사이 거리와 인구가 더 적혀 있는데, 여기서는 줄였으나 결코 작은 영역으로 볼 수 없는 넓이를 설명하고 있다.
이 방위대로 블록을 만들어 쌓은 것이 이 글 대표이미지의 왼쪽 그림이다. 블록 안의 몇몇 지명 또한 동이전에 나오는 것들이다. 정확한 자리는 아니겠지만 그 위치를 추정하여 지도 위에 얹어 보면 오른쪽 그림이 된다.
다만 한 가지를 미리 밝혀 둔다. 블록은 서로 붙지만, 그 덩어리 전체를 지도 어디에 얹을지는 장성과 요동이 어디냐에 달려 있다. 이 글에서는 그 둘의 자리를 정하지 않고 따로 다루겠다. 덧붙여, 五代 이후에 쓰인 요하(遼河)를 그 이전 사서의 요수(遼水)에 소급해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만 적어 둔다.

삼한 방사천리, 초나라 방오천리
앞의 조목에서 삼한 전체를 두고 地合方四千餘里(지합방사천여리), 곧 방 4천여 리라 하였다. 이 수치는 그 자체로는 실감이 오지 않는다. 비교할 자가 있어야 한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전국시대 가장 큰 나라였던 초나라를 설명하며 방 5천 리라 하였다. 그렇다면 삼한 78국을 합한 땅이 전국시대 최대국 초나라에 크게 못 미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고구리 하나만 해도 방 2천 리라 적혀 있었다.
이 숫자를 손에 쥐고 압두남 지도를 다시 보면, 셈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 곧 드러난다. 압두남 전체를 다 내주어도 삼한 하나가 들어가지 못한다. 하물며 그 위에 예와 옥저와 고구리와 부여와 읍루를 얹을 자리는 남지 않는다. 블록은 서로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그릇이 작은 것이다.
여기에 東西以海爲限(동서이해위한), 곧 동쪽과 서쪽을 모두 바다로 한계 삼았다는 구절이 겹친다. 방 4천여 리의 땅이 양쪽으로 바다를 두르고 있다는 뜻이다. 이 두 구절을 함께 놓으면, 삼한을 어디에 놓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산술의 문제가 된다.
낙랑국의 위치
동이전은 낙랑을 다른 나라의 경계로만 적는다. 예의 서쪽이 낙랑에 이르고, 마한의 북쪽이 낙랑이라 하였다. 두 구절을 겹치면 낙랑은 예의 서편, 마한의 북편이라는 자리가 나온다. 그러나 낙랑 자체를 세운 조목은 없다.
그래서 이 하나만은 ‘삼국사’를 빌린다. 대무신왕 15년 4월, 왕자 호동이 옥저에 유람하다가 낙랑국왕 최리를 만나는 기사다. 호동이 옥저를 다닐 수 있었다는 것은 옥저가 고구리의 영역 안에 있었거나 적어도 불편한 사이가 아니었다는 뜻이고, 최리 또한 그곳까지 나와 순행할 수 있었다면 옥저가 그의 경계에서 멀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더욱이 최리가 호동을 보고 ‘북국 신왕의 아들’이라 하였으니, 최리의 낙랑국은 고구리의 남쪽에 있었다.
이 세 조건, 곧 예의 서쪽·마한의 북쪽·고구리의 남쪽이 한 자리에서 만난다. 블록 그림에서 낙랑을 그 자리에 놓은 근거가 이것이다. 낙랑에 관하여 이 글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낙랑국의 위치와는 별개로, 압두남에 관하여 덧붙일 것이 있다. 이 땅에서는 명문이 확인된 자료가 나왔다. 덕흥리 무덤의 묵서 묘지명에 유주자사 진이 적혀 있고, 충주 중원의 비는 고구리가 세운 비문을 지니고 있으며, 경주 호우총에서 나온 호우는 바닥에 광개토왕을 가리키는 명문을 새기고 있다. 이들은 압두남이 한때 고구리의 영역이었음을 말해 준다.
이것은 최리의 낙랑국이 어디 있었느냐와는 다른 명제다. 두 이야기를 한자리에 붙여 놓으면, 낙랑국이 압두남에 있었다는 말로 읽히기 쉽다. 그런 뜻이 아니다. 앞의 것은 사서 구절로 자리를 잡은 것이고, 뒤의 것은 명문으로 확인된 영역의 흔적이다. 근거의 종류가 다르므로 결론도 따로 세워야 한다.
맺음말
이 블록은 더 검증될 수 있고, 또 검증해 갈 것이다. 고대 사서에서 찾은 지명이 지금도 그 땅에 남아 있는지, 사서 속 사건의 이동이 같은 흐름으로 이어지는지, 산천의 환경이 기록과 맞는지를 하나씩 맞추어 보는 일이 남아 있다. 지명은 정권이 바뀌어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가장 작은 단위에 오히려 오래 남는다.
다만 이 인용문들의 한계도 적어 둔다. 하나는 이들과 직접 교차 검증할 다른 계통의 자료가 없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저들에게 비친 우리의 앞모습은 볼 수 있으되 우리의 뒤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블록의 북쪽 끝을 ‘그 끝을 알 수 없다’고 적은 읍루 조목이 그 한계를 그대로 보여 준다.
더 안타까운 것은 유물 쪽이다. 위에 기록된 땅에서 나온 유물이 올바른 시각으로 평가되지도 않고, 새로 발굴할 수도 없다. 사학계는 이러한 위치도를 그려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믿지도 않으므로, 시각을 바로잡을 기회 자체가 없었던 셈이다.
그림의 정확성은 자료를 보태어 계속 보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큰 틀 자체가 흔들릴 자료가 더 나올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 틀을 쥐고 보면 저들이 그려 놓은 지도가 어디서 어긋나는지 바로 보이고, 저들의 사서를 읽을 수 있는 틀 또한 준비된 셈이며, 옮겨 놓은 지명을 조금이라도 제자리로 돌릴 계기는 된 것이다. 모쪼록 이 틀이 정교해지고 널리 쓰이기 바랄 뿐이다.
끝으로 이 그림 그리기를 최초로 시도한 사람은 우리민족사연구회 회장 오재성 씨임을 밝혀 둔다.
참고 사료 및 자료
- ‘三國史’, 高句麗本紀, 大武神王 15년조.
- ‘後漢書’ 권85, 東夷列傳 제75.
- ‘三國志’ 권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제30.
- ‘史記’, 소진열전.
- ‘三國史’ 옥산서원 소장 보존판 사진.
- 고대 국가 방위 블록도 및 현대지도 대조도: 필자 연구 자료. 최초 구상자 오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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