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전의 영역 기록은 대륙을 가리킨다
지난 글(역사지명 「우리나라 고대 국가는 어디 있었는가」)에서는 『삼국지』를 인용하여, 지나인들이 ‘동이’라 부른 종족의 영역을 대략적이고 조감적으로 추정해 보았다. 그런데 삼국이 존재한 60년 동안에만 삼한을 비롯한 동이 족속이 그 영역을 차지하고 그 뒤로는 사라졌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그 영역 차지가 뒤로 어떻게 이어졌는지는 당연히 물어야 하고, 사서로 확인해야 한다.
이 글에서 高句麗·高驪는 모두 ‘고구리’로 적는다. 왕건이 세운 高麗만 ‘고리’로 적어 구분한다.

거품처럼 명멸한 지나의 나라들, 굳건한 우리 삼국
지나의 삼국시대(220~280)는 삼국 가운데 어느 한 강자도 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끝났다. 조조의 위나라를 실질적으로 장악한 사마씨가 강제로 선양받아(265) 세운 나라가 晉(진)이다. 진의 사마염이 오나라를 멸망시키면서(280) 짧았던 지나의 삼국시대는 막을 내린다. 그 진이 내부 정권 다툼으로 51년 만에 무너지고(316), 남쪽 장강 건너로 내려가 숨만 쉬다가 부패 속에 끝내 망했다(420). 후대에 이를 ‘동진’이라 부른다. 그럼에도 지나의 역사는 그 동진과 동진을 잇는 남조를 정통 역사의 계승자로 인정한다. 동진이 104년 만에 망한 뒤로는 단명한 송·제·량·진이 차례로 거품처럼 일어섰다 꺼지고, 마지막 진이 북쪽에서 일어난 수에 멸망하면서(589) 남조는 끝난다.
북쪽에서는 산서성 일대를 중심으로 (지나가 ‘북적’으로 가르는) 흉노·선비·갈 등 5호의 열여섯 나라가 명멸한다. 지나의 역사는 이들을 굳이 이민족의 나라로 갈라 놓으면서도, 정작 그 역사는 제 역사 안으로 끌어들여 서술한다. 만리장성 밖의, 자기들이 비문명적이라 흉보던 종족이 이룩한 역사를 왜 그토록 필사적으로 粉飾(분식)하여 끌어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당장 원나라는 몽골의 역사일 뿐인데 어찌 지나의 역사가 될 수 있겠는가.
필자 눈에는 지나에 진정 제 것이라 할 역사가 없기 때문에 집착하는 것으로 보인다. 곧 주나라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동이 상나라의 제후국이 본국을 무너뜨리고 선 나라이니 종족이 다르다고 단정할 수 없다. 그 제후국 또한 「오제본기」의 계통도로 보아 동이가 아닌 종족으로 가를 수 없어 보인다. 유방 또한 땅을 파면 동이계 유물이 출토되는 산동성 턱 밑 패현 출신이라니 동이일 것 같아 보이고, 낙양 출신이라는 조광윤 정도만 한족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고리 출신이라는 이야기도 꽤 무성했으나, 시대가 흐름을 타면서 그러한 기억은 지워져 버렸다.
후한, 위·촉·오 삼국, [진, 송·제·량·진], [16국, 북위, 〈동위·북제〉, 〈서위·북주〉], 수, 당으로 서른두 나라가 명멸하는 동안, 고구리·백제·신라 우리 삼국은 꿋꿋하게 생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 역사는 그 위치와 영역을 거의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니 얼마나 딱한 일인가.

동이는 전쟁이 없어 기록조차 없는가
앞 글에서 살펴본 후한서와 삼국지만이 아니다. 뒤를 잇는 사서들에서도 동이전의 나라들은 삼국지에서 보았던 그 자리에 그대로 존속하고, 왜 또한 ― 적어도 왜를 기록한 남조 계열 사서에서는 ― 늘 같은 자리에 적혀 있다. 더욱이 『삼국사』를 읽으면 왜는 늘 분쟁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사서를 차례로 인용하며 밝혀 보기로 한다.
『진서』가 적은 자리 ― 부여·마한·진한·숙신·왜인
『진서(晉書)』 권97 열전 제67 사이(四夷) 동이 ― 부여국·마한·진한·숙신씨·왜인·비리 등 10국
〔부여국〕
夫餘國在玄菟北千餘里, 南接鮮卑, 北有弱水, 地方二千里, 戶八萬.
부여국은 현토의 북쪽 1천여 리에 있는데, 남쪽은 선비와 접해 있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 국토의 면적은 방 2천 리이고 호수는 8만이다.
〔마한〕
韓種有三: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在帶方南, 東西以海爲限. 馬韓居山海之間, 無城郭, 凡有小國五十六所, 大者萬戶, 小者數千家, 各有渠帥.
한에는 세 개의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진한은 대방(군)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해(海)로 한계를 삼는다. 마한은 산과 해 사이에 자리 잡았고 성곽이 없으며, 작은 나라가 모두 쉰여섯이다. 큰 것은 1만 호, 작은 것은 수천 가이고 저마다 거수가 있다.
〔진한〕
辰韓在馬韓之東, 自言秦之亡人避役入韓, 韓割東界以居之.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진한 사람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秦(진)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로서 고역을 피하여 韓(한)에 들어왔는데, 한이 동쪽 지역을 분할하여 그들을 살게 하였다고 한다.
〔숙신씨〕
肅愼氏一名挹婁, 在不咸山北, 去夫餘可六十日行. 東濱大海, 西接寇漫汗國, 北極弱水. 其土界廣袤數千里.
숙신씨는 일명 읍루라고도 하는데, 불함산 북쪽에 있으며 부여에서 60일쯤 가야 하는 거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大海에 연해 있고, 서쪽으로는 구만한국과 접해 있으며, 북쪽은 약수에까지 이른다. 그 땅의 경계는 사방 수천 리에 뻗쳐 있다.
〔왜인〕
倭人在帶方東南大海中, 依山島爲國, 地多山林, 無良田, 食海物. 舊有百餘小國相接, 至魏時, 有三十國通好. 戶有七萬. 男子無大小, 悉黥面文身. 自謂太伯之後, 又言上古使詣中國, 皆自稱大夫. 昔夏少康之子封於會稽, 斷髮文身以避蛟龍之害, 今倭人好沈沒取魚, 亦文身以厭水禽. 計其道里, 當會稽東冶之東.
왜인은 대방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섬으로 나라를 이루고 있어 그 땅은 산림이 많고 좋은 밭은 없으며 해산물을 먹고 산다. 옛날에 백여 개의 작은 나라가 서로 인접해 있었으며, 魏(위)대에 이르면 삼십 개 나라가 통교하게 되었다. 호는 7만이다. 남자는 성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얼굴과 몸에 문신을 한다. 스스로 태백의 후손이라 하였다. 또 아주 옛날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 모두 대부라 자칭하였다고 한다. 옛날 하나라 소강의 아들이 회계에 봉해지자 머리를 자르고 몸에 문신을 하여 교룡의 공격을 피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지금 왜인은 잠수하여 물고기를 즐겨 잡는데, 왜인 역시 몸에 문신해서 해로운 바다짐승을 막고자 하였다. 그 위치를 따져 보면 회계군 동야의 동쪽에 해당한다.
부여의 경우는 오히려 ‘地方二千里 戶八萬’이라는 구체적 기록이 보태졌음을 알 수 있다. 방향이 달라진 데가 없이 일관성이 유지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아울러 마한조 첫머리의 ‘馬韓居山海之間(마한은 산과 해 사이에 자리 잡았다)’은, 바로 앞 구절 ‘東西以海爲限’의 海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와 맞물려 따로 다룰 값어치가 있는 문구다.
의아한 사실은, 고구리와 백제가 강력하던 시절을 다루면서도 그 전신이라 할 삼한만 기록하고 고구리·백제·신라의 조(條)는 두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주 세민의 명에 의하여 당대 내로라하는 학자 스물한 명이 편찬한 사서이고(『신당서』 예문지 2), 삼국의 사정에 밝을 때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더욱 의심스럽다. 세민의 거듭된 고구리 정벌이 대패로 끝났으니, 편찬자들이 패전 상대국의 기록을 회피하였다고밖에 판단할 수 없다. 필자만의 추정이다.
『송서』가 적은 자리 ― 백제와 왜국
『송서(宋書)』 권97 열전 제57 夷蠻(이만)
〔백제〕
百濟國, 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晋平郡晋平縣.
백제국은 본래 고구리와 더불어 遼東(요동)의 동쪽 1천여 리 밖에 있었다. 그 후 고구리는 요동을, 백제는 요서를 경략하여 차지하였다. 백제가 통치한 곳은 진평군 진평현이라 한다.
〔왜국〕
倭國在高驪東南大海中. ~ 讚死, 弟珍立, 遣使貢獻. 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表求除正, 詔除安東將軍·倭國王. ~ 二十八年, 加使持節·都督倭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六國諸軍事·安東將軍如故. ~ 興死, 弟武立, 自稱使持節·都督倭 百濟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왜국은 고구리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 찬이 죽고 아우인 진이 즉위하자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스스로 칭하기를 ‘사지절 도독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이라고 하였다. 표를 올려 정식으로 임명해 주기를 구하므로, 조를 내려 ‘안동장군 왜국왕’에 제수하였다. ~ [원가] 28년(451)에 사지절 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육국제군사를 더하고, 안동장군은 전과 같이 하였다. ~ 흥이 죽자 아우인 무가 즉위하여 ‘사지절 도독 왜·백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칠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을 자칭하였다.
남조의 나라인 류씨 송나라를 기록한 송서의 고구리 조는 위치 정보가 없어 생략하였고, 백제가 요동만이 아니라 요서까지 영역을 차지하였다는 기록이 눈에 띈다.
왜의 기록은 (남조를 하나로 모아 기록한) 남사가 조금 더 많지만, 이전의 기록과 달리 매우 특이하다. 자칭이라고 하였지만 ‘使持節·都督 ~ 六國諸軍事’를 문자 그대로만 이해하자면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여섯 나라를 통솔하는 안동대장군이요 왜국의 왕’이라는 뜻이 된다. 송이 존재한 기간은 420~479인데, 적어도 이 작호가 오르내린 시기에는 백제와 신라보다 왜가 더 강하였다는 뜻일 수 있다. 불과 몇 년 뒤에는 백제가 빠지고 가라가 들어갔고, 또 얼마 뒤에는 백제도 가라도 모두 들어가 일곱 나라가 되어 있다. 아쉬운 사실은 이 나라들을 실제로 지배하였는지 교차검증할 자료가 없다는 점이다. 자칭을 그대로 옮겨 적은 기록임을 잊지 말고 읽어야 한다.

『남제서』가 적은 자리 ― 고구리·가라·왜국
『남제서(南齊書)』 권58 열전 제39 蠻·東南夷(만·동남이)
〔고구리〕
東夷高麗國, 西與魏虜接界. 宋末, 高麗王樂浪公高璉爲使持節·散騎常侍·都督營平二州諸軍事·車騎大將軍·開府儀同三司.
동이 고구리국은 서쪽으로 魏(위; 북위) 오랑캐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宋(송; 남조 송)나라 말에 고구리왕 낙랑공 고련을 사지절 산기상시 도독 영·평 이주제군사 거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로 삼았다.
〔가라〕
加羅國, 三韓種也. 建元元年, 國王荷知使來獻.
가라국은 삼한의 한 종족이다. 建元 원년(479) 국왕 荷知가 사신을 보내와 방물을 바쳤다.
〔왜국〕
倭國, 在帶方東南大海島中, 漢末以來, 立女王. 土俗已見前史. 建元元年, 進新除使持節·都督倭 新羅 任那 加羅 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武號爲鎭東大將軍.
왜국은 대방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는데, 漢(한) 말 이래로 여왕을 세웠다. 토속에 대해서는 이미 이전의 역사서에 보인다. 건원 원년(479)에 올려서 새롭게 사지절 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 무를 진동대장군이라 칭하였다.
남제서의 백제 부분은 앞 글에서 제시한 대로, 고구리의 뒷부분과 백제의 앞부분에 해당하는 18자×18줄의 원본이 뜯겨 없어지고 남은 일부분의 기록임에도 지나대륙의 엄청나게 큰 영역을 차지하였음을 보여 주었다. 역사지명 카테고리의 지난 글 「우리나라 고대 국가는 어디 있었는가」를 꼭 참조하시기 바란다.
가라 삼한의 한 종족으로 기록하고, 건원 원년(479)에 국왕 하지가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고 적었다. 가라는 송서, 수서, 한원, 통전 등에도 등장하지만, 그 기록만으로 각 사서의 가라가 모두 같은 나라였는지 단정하기 어렵다. 특히 가라를 삼한의 한 종족으로 규정한 기록은 삼한의 영역이 지나대륙에 있었다는 관점에서 이 문제를 깊이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그 글에서 인용하지 않은 부분만 다루었는데, 여기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북위가 고구리의 서쪽에 있다고 하였으니, 적어도 이 시기 북위의 동쪽 경계가 고구리와 맞닿아 있었다는 뜻이 된다. 한편 ‘營平二州諸軍事(영·평 이주제군사)’라는 구절은 (반드시 실효지배 여부를 확정하지 못할 수도 있으나) 영주와 평주의 군권이 고련(장수왕)과 연관관계가 있음을 알려 준다. 영주와 평주를 산서성 태원 인근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는데, 그렇게 되면 ‘북위가 고구리의 서쪽에 있다’는 앞 구절과 충돌하므로 심각한 연구 대상으로 떠오르는 문제이기도 하다.
『양서』가 적은 자리 ― 고구리·백제·신라·왜
『양서(梁書)』 권54 열전 제48 諸夷(제이)
〔서론〕
東夷之國, 朝鮮爲大. ~ 魏時, 朝鮮以東馬韓·辰韓之屬, 世通中國. 自晉過江, 泛海東使, 有高句驪·百濟, 而宋·齊間常通職貢, 梁興又有加焉.
동이의 여러 나라 중에서 조선이 제일 강대하였다. ~ 魏(위)나라 때는 조선 동쪽의 마한·진한 등이 대대로 중국과 왕래하였다. 晋(진)나라가 양자강을 건너간 후부터 海(해)를 건너온 동방의 사신으로는 고구리·백제 등이 있었는데, 송·제 시대에도 항시 직공하였으며 梁(양)나라가 흥기하자 더욱 빈번히 내왕하였다.
〔고구리〕
句驪地方可二千里, 中有遼山, 遼水所出. 其王都於丸都之下.
고구리의 국토는 방 약 2천 리이다. 영토 가운데 遼山(요산)이 있고 遼水(요수)가 흘러나온다. 그 나라의 왕도는 환도의 아래에 있다.
〔백제〕
百濟者, 其先東夷有三韓國, ~ 馬韓有五十四國. 大國萬餘家, 小國數千家, 總十餘萬戶, 百濟卽其一也. 後漸强大, 兼諸小國. 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 晉世句驪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
백제는 그 시초가 동이의 삼 한국인데 ~ 마한은 54국이 있었다. 대국은 1만여 가, 소국은 수천 가로서 모두 10여만 호가 되었는데, 백제는 곧 그 가운데 한 나라였다. 뒤에 점점 강대하여져서 여러 작은 나라들을 합쳤다. 그 나라는 본래 고구리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晋(진)나라 때에 이르러 고구리가 이미 요동을 경략하자, 백제 역시 요서·진평 2군의 땅을 점거하여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號所治城曰固麻, 謂邑曰檐魯, 如中國之言郡縣也. 其國有二十二檐魯, 皆以子弟宗族分據之.
(백제는) 도성을 고마라 하고 읍을 담로라 하는데, 이는 중국의 군현과 같은 말이다. 그 나라에는 22담로가 있는데, 모두 (왕의) 자제와 종족에게 나누어 웅거케 하였다.
〔신라〕
新羅者, 其先本辰韓種也. 辰韓亦曰秦韓, 相去萬里. ~ 其國在百濟東南五千餘里. ~ 其地東濱大海, 南北與句驪·百濟接. 魏時曰新盧, 宋時曰新羅, 或曰斯羅. 其國小, 不能自通使聘.
신라는 그 선조가 본래 진한의 종족이었다. 辰韓(진한)을 秦韓(진한)이라고도 하는데, (양나라와) 서로 1만 리쯤 떨어져 있다. ~ 그 나라는 백제의 동남쪽 5천여 리 밖에 있다. 동으로는 큰 바다와 접해 있고, 남북으로는 고구리·백제와 접하고 있다. 魏(위; 북위)나라 때는 新盧(신로)라 불렀고, 宋(송; 류송)나라 때는 신라 또는 사라라 하였는데, 나라가 작아서 독자적으로 사신을 파견할 수 없었다.
〔왜〕
倭者, 自云太伯之後. 俗皆文身. 去帶方萬二千餘里, 大抵在會稽之東, 相去絶遠. 從帶方至倭, 循海水行, 歴韓國, ~ 又南水行十日, 陸行一月日, 至邪馬臺國, 卽倭王所居. ~ 物産略與儋耳·朱崖同.
왜는 스스로 말하기를 태백의 후예라고 한다. 풍속으로는 모두 문신을 한다. 대방으로부터 1만 2천여 리 떨어져 있는데, 대체로 회계의 동쪽에 있으며 서로 떨어진 바가 아주 멀다. 대방에서 왜까지는 海(해)를 따라 물길로 가야 하는데 韓國(한국)을 거쳐, ~ 다시 남쪽으로 물길로 10일, 육지로 1달을 가면 야마대국에 이르는데, 왜왕이 거처하는 곳이다. ~ 물산은 대체로 담이·주애와 같다.
양서는 서문에서 특히 조선을 서술하였다. 다만 앞의 조선은 단군조선을 말하고, 뒷 문장의 위는 삼국시대의 위(조조의 위나라)이며 그때 조선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으므로 조선현 등을 말하는 것으로 판단해야 합리적일 것이다.
그리고 고구리 영역이 요산과 요수를 품고 있음을 언급한 대목이 있다. 사서가 말하는 바는 ‘요산과 요수가 고구리 영역 안에 있다’는 데까지다. 이 ‘遼(요)’를 필자는 대략 동경 113도 30분, 북위 37도에 위치한 산서성 遼縣(요현, 1942년에 좌권으로 지명을 변경한다)으로 본다. 그렇게 읽으면 고구리의 위치를 이만큼 명백하게 밝힌 기록은 달리 찾기 어렵다. 이 비정의 근거는 여러 번에 걸친 주제가 되겠기에 따로 글을 마련하여 밝히기로 한다. 수와 당에 걸친 시기의 편찬이었지만, 아마도 사찬이었기에 가능한 기록이었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환도가 명기되어 있음에도 그 위치를 특정할 수 없어 안타깝다.
한편 왜의 물산이 담이·주애와 대체로 같다고 한 끝 구절은, 앞서 ‘회계의 동쪽’이라 한 위치 기술과 나란히 놓고 읽어야 할 단서다.
위서와 주서는 고구리·백제 조를 두고 있으나 이 글의 주제인 영역 비정에 보탤 만한 위치 기술이 적어 생략하였다. 두 사서 모두 북조의 나라를 다룬 터라 왜와 접촉할 일이 없어서인지 왜의 기록도 없다. 나아가 남조의 마지막 나라인 陳(진)을 다룬 진서(陳書)는 워낙 빈약하여 이민족에 대한 열전이 아예 없다.
맺음말
이후의 사서인 북사와 남사, 수서와 신·구당서의 동이전에도 대단히 중요한 우리 역사가 담겨 있으나, 우리 삼국의 위치를 알아내고 확인하려는 이 글의 주제에서 벗어날 수 있어 다음 기회에 다루기로 하겠다.
끝으로, 이 글과 앞 글에서 알 수 있었듯이 비록 『삼국사』로는 알 수 없던 우리 역사의 영역을 사서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왜 그러한 당연한 기록이 간과되었는지, 그 영역을 올바로 알지 못하면서 우리 족속이 얼마나 억울함을 당했는지 생각하면 통탄스럽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의 행동은 마음에서 나오고 마음은 지식이 빚어내는 것이라면, 올바른 역사를 알아 가며 인류 평화에 공헌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우리가 편안한 마음으로 살 수 있지 않겠는가.
korec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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