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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산과 요수 그리고 고구리 중심강역

korecult 읽는 시간 약 16분

역사를 말할 때 우리에게 단단히 박혀 있는 인식의 틀을 깨지 못하면, 필자가 쓰는 어떤 내용도 독자들에게 이해되기 어렵다. 그 인식은 어려서부터 받은 교육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어 어지간한 충격으로는 깨지지 않는다. 그러니 문제는 그 인식의 뿌리다. 요수와 요하를 같은 강으로 여기는 생각도 그 가운데 하나다.

누구나 우리 역사가 이루어진 땅을 이렇게 배웠다. 한강 남쪽의 서쪽 반에 백제, 동쪽 반에 신라가 있었고, 고구리는 그 북쪽에서부터 광활한 만주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통설은 이 인식을 유물 발굴로 단단히 뒷받침한다. ‘묻지 마’ 신라 유물, 백제 유물이 그것이다. 문자로 밝혀지지 않았는데도 경상도에서 나오면 무조건 신라 유물, 충청도 인근에서 나오면 무조건 백제 유물이라고 단정하고 믿는다.

심지어 경주의 한 무덤에서 광개토대왕을 명시한 글자가 나왔는데도, 고구리 유물임을 부정하는 갖은 비논리적 변명을 앞세운다. 1913년 북한 평양에서 신작로를 내려고 허문 내성 동벽에서는 ‘漢城(한성)’이라는 지명과 함께 ‘小兄文達(소형문달; 소형이라는 직위에 있던 문달이라는 축성 책임자)’이 쌓았다고 새긴 석각이 나왔는데도, 이를 아예 외면하고 연구 대상으로 삼지도 않는다.

또 하나의 예가 遼河(요하)다. 요하는 요동과 한 묶음이 되어 왜곡된 인식을 굳건하게 만든다.

왜곡된 역사를 고정시키는 대못, 요하와 요동

동이 종족이 자리한 위치를 추적한 지난 편에서, 양서에 실린 고구리의 영역 기록을 인용하였다.

其地方可二千里,中有遼山,遼水所出。

그 땅은 사방 2천 리쯤인데, 가운데에 요산이 있고 요수가 거기서 흘러나온다.

(양서 권54, 열전 제48 제이 고구리)

이 문구는 遼(요)라는 지명이 고구리의 위치를 찾아 들어가는 열쇠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여기서는 ‘요수’라고 했지 요하라고 하지 않았다. 알고 보니 요하는 아주 후대에 생긴 이름이고, 송나라 때 편찬된 사서까지도 요수만 있었을 뿐 요하는 없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遼(료)의 훈은 ‘멀’이라, ‘멀 료’라 한다(료가 요가 되는 것은 우리나라 발음체계를 마구 허물어뜨리는 한글문법의 두음법칙 때문임은 누구나 알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에게서 먼가를 물어야 한다. 양서는 고구리의 영토 가운데 요산이 있고 그 산에서 요수가 흘러나온다고 하였으니, 결코 고구리에게서 먼 곳일 수 없다.

그렇다. 지나의 政體(정체), 곧 지나의 국가들에게 먼 곳이었던 것이다. 뜻풀이로 샛길로 빠진 김에 지명 관련 글자를 하나 더 짚고 가겠다. 幽(유)는 그윽하다, 아득하다, 멀다는 뜻을 갖고 있다. 幽州(유주) 또한 역사를 연구하다 보면 수없이 부딪히는 지명으로, 역시 저들에게 먼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통설의 사학은 유주를 북경 인근에 모셔다 놓았지만, 조금만 연구가 깊어지면 산서성이었음을 알게 된다. 유주의 원래 위치는 다른 글에서 따로 다룰 예정이다.

요수와 요하, 사서에 언제 나타나는가

양서가 고구리 영역에서 말하는 물줄기 이름은 요수이고, 우리가 흔히 알던 만주의 강은 ‘요하’다. 우리에게 워낙 중요한 내용이라 다른 사서도 검토하였는데, 놀랍게도 요수와 요하는 같은 강이 아니라 다른 강으로 의심되었고, 시대에 따라 그 이름이 달라진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여러 방향으로 검토하다가 사서별로 遼(요)가 들어간 지명의 기록 횟수를 세어 보았다.

사서요산요수요하요해요택요동요서요주비고
사기000003280
한서0000033160
후한서11010104270
삼국지03(3)010134200(위략)
晉書(진서)0501084480
송서000001780
남제서00000100
양서110001310
陳書(진서)000002–0
위서0008023510
북제서00000520
주서01020840
남사11000410
북사08000169600
수서(1)9000142120(저본의 주석)
구당서77083921116
신당서49043781410
구오대사020014037
신오대사010004012
송사5004308117
요사031525294012
금사585(7)61127417(1)(저본의 주석)
원사34730128614
명사10411(1)022204(1)萬斯同 편찬
명사1320270561310張廷玉 편찬
청사고1(1)5(4)985(3)1119511(저본의 주석)

〈표〉 사기부터 청사고까지 26종 사서에 나타난 遼(요) 관련 지명의 출현 횟수(필자 집계). 괄호 안 숫자는 본문이 아닌 주석에 나오는 횟수다.

표에서 보듯 요하라는 어휘는 오대 이전의 사서에 단 한 번도 보이지 않는다. 송나라 때 편찬된 신당서와 신오대사에도 요수만 있을 뿐 요하는 없다. 요하는 원나라 때 편찬된 요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타나고, 금사·원사·명사를 거쳐 청사고에서는 98회로 늘어난다. 그런데 요수를 만주의 요하로 간주하면 사서의 전쟁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이동 거리가 너무 멀어 식량을 비롯한 군수물자 보급이 가능했을지, 군사가 그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었을지, 모든 것이 의심스러워진다.

그 단적인 예로 수나라의 고구리 침략을 들 수 있다. 수서에 따르면 동원한 군사가 113만이었다. 그 많은 무리를 수나라 본토에서 만주의 요하 동쪽까지 천㎞가 넘는 거리로 옮길 수 있었겠는가. 손자병법 軍爭篇(군쟁편)은 먼 거리를 서둘러 달려가 싸우는 것이 곧바로 파멸로 이어진다고 경계하였다.

百里而爭利,則擒三將軍 ~ 五十里而爭利,則蹶上將軍,其法半至。

백 리를 달려가 이익을 다투면 세 장군이 모두 사로잡히고, ~ 오십 리를 달려가 이익을 다투면 상장군이 꺾이고 군사는 절반만 이른다.

(손자병법 군쟁편)

물론 손자가 살던 기원전 500년경과 천 년이 지난 600년대는 다르다. 그렇더라도 사람을 실어 나르는 수단이 비약적으로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천㎞도 넘는 거리를 행군하여 전쟁을 치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 전쟁 기록 가운데는 깃발만 960리(400㎞ 상당)에 걸쳤다는 대목도 있다. 기록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느냐는 문제는 별도로 하더라도, 전쟁터는 천㎞가 되지 않는 범위로 생각해야 합리적이다. 그렇다면 요사 이전의 요수를 요하로 볼 수는 없다.

遼(요)라는 지명은 1942년까지 있었다

그렇다면 遼東(요동)은 遼(요)라는 지명의 동쪽에 있었을 터이고, 遼山(요산)과 遼水(요수) 또한 요 인근에 있었을 터이다. 遼陽(요양)은 요수의 북쪽에 있어서 생기는 지명이다. 이 관련 지명들을 찾으면 많은 진실을 알게 되겠지만, 지명은 엄청나게 뒤집혀 있다. 그렇더라도 그 뿌리를 찾아내면 올바른 역사를 되찾을 수 있다.

산서성에는 현재 左權(좌권)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1942년에 바뀐 이름이다. 그전에는 遼縣(요현)이었다. 遼(요)라는 지명은 1942년까지 어느 옛 지도에서나 같은 자리에 있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지도래야 송나라 때 지도이지만, 송부터 중화민국까지 그 위치는 늘 같았다. 그런데도 송의 지도는 요와 요수를 멀리 떼어 놓았다.

요수와 요하 – 1936년 산서성 지도와 1137년 화이도의 遼(요) 위치 비교
왼쪽은 1936년 山西省(산서성) 지도로, 遼縣(요현) 자리에 遼(요)가 있고 그 곁으로 청장수와 탁장수가 흐른다. 오른쪽은 1137년 석각 華夷圖(화이도)로, 遼(요)는 같은 자리에 있으나 遼水(요수)는 멀리 동북쪽에 그려져 있다.

요수가 遼(요) 인근에 있어야 논리적이라면 산서성을 흐르던 강임이 틀림없다. 그 遼(요) 인근에는 청장수가 흐르는데, 바로 이 청장수가 이름이 바뀐 것이 아닌가 의심해 볼 수 있다.

요동의 위치는?

자료가 부족한 우리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원문을 참조할 때 기본으로 이용하는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중국철학서전자화계획; ctext.org)에서 요동이 등장하는 첫 기록을 찾아보았다. 한나라 문제 시기(BCE 180~157)에 활동한 賈誼(가의)의 ‘賈誼新書(가의신서)’에 보이지만, 흉노의 침략에 대처하는 원론적인 이야기라 위치 정보는 없었다. 결국 요동에 관한 첫 기록은 사기로 돌아간다. 진시황 본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二十年 ~ 燕、代發兵擊秦軍,秦軍破燕易水之西。

20년 ~ 연나라와 대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 군사를 쳤으나, 진나라 군사가 연나라를 이수 서쪽에서 깨뜨렸다.

二十一年 ~ 乃益發卒詣王翦軍,遂破燕太子軍,取燕薊城,得太子丹之首。燕王東收遼東而王之。

21년 ~ 이에 군사를 더 징발하여 왕전의 군영으로 보내, 마침내 연나라 태자의 군대를 깨뜨리고 연나라 도읍인 계성을 빼앗고 태자 단의 수급을 얻었다. 연나라 왕은 동쪽으로 요동을 수습하여 거기서 왕 노릇을 하였다.

二十五年 大興兵,使王賁將,攻燕遼東,得燕王喜。還攻代,虜代王嘉。

25년 군사를 크게 일으켜 왕분을 장수로 삼아 연나라의 요동을 쳐서 연나라 왕 희를 잡았다. 돌아오면서 대나라를 쳐서 대나라 왕 가를 포로로 잡았다.

(二十六年, BCE 221) 分天下以為三十六郡 ~ 地東至海暨朝鮮,西至臨洮、羌中,南至北嚮戶,北據河為塞,並陰山至遼東。

(26년) 천하를 나누어 36군으로 만들었다. ~ 영토는 동쪽으로 海(해)에 이르고 조선에 닿았으며, 서쪽으로 임조와 강중에 이르렀고, 남쪽으로 북향호에 이르렀으며, 북쪽으로는 하수에 의지하여 요새를 삼고 음산과 나란히 하여 요동에 이르렀다.

(사기 권6, 진시황본기)

이 인용문에서 연나라와 대나라는 같은 진격로에 이웃하고 있었기에 진나라 군대에 함께 격파당했음을 알 수 있다. 대나라는 산서성 안문관 남쪽(대현)에서 거의 옮겨 가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곧 대나라의 위치가 열쇠의 하나가 된다. 또 연나라의 동쪽이 요동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연나라의 도읍은 계성인데, 오늘날 지도는 북경 동쪽의 계현을 그 자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통설의 사학은 북경을 연의 중심지로 삼고, 연의 영역을 산서성부터 요녕성 경계까지로 잡는다(이 계현 또한 산서성 태원 인근이었음을 다른 글에서 밝힐 것이다).

한편 ‘동쪽으로 海(해)에 이르고 조선에 닿았다’고 하였는데, 통설의 사학은 조선의 영역을 만주에 고정하다 보니 海(해)를 발해로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듯하다. 이 또한 따로 증명하겠으나, 비파형 청동검이 나오는 곳을 조선의 영역이라고 규정한다면 산동성 등지에서도 청동검이 엄청나게 발굴되고 있는 상황을 모르거나 무시하는 것이라는 말로 넘어가겠다.

요동의 위치에 대해 더 흥미로우면서도 이상한 증언은 사기 권69 소진열전에 있다. 소진이 연나라 문후에게 유세하며 연나라의 처지를 설명한 대목이다. 한서 권28 지리지 하와 사기 권17에도 정보가 있어 함께 인용한다.

燕東有朝鮮、遼東,北有林胡、樓煩,西有雲中、九原,南有嘑沱、易水,地方二千餘里 ~ 粟支數年。南有碣石、鴈門之饒,北有棗栗之利。

연나라는 동쪽으로 조선과 요동이, 북쪽으로 임호와 누번이, 서쪽으로 운중과 구원이, 남쪽으로 호타와 이수가 있습니다. 땅은 사방 2천여 리이고 ~ 곡식은 몇 해를 버틸 만합니다. 남쪽으로는 碣石(갈석)과 鴈門(안문)의 풍요로움이 있고, 북쪽으로는 대추와 밤의 이로움이 있습니다.

(사기 권69, 소진열전)

燕地 ~ 武王定殷,封召公於燕 ~ 東有漁陽、右北平、遼西、遼東,西有上谷、代郡、鴈門,南得涿郡之易、容城、范陽、北新城、故安、涿縣、良鄉、新昌,及勃海之安次,皆燕分也。樂浪、玄菟,亦宜屬焉。

연나라 영역은 ~ 무왕이 은나라를 평정하고 소공을 연에 봉하였다. ~ 동쪽으로 어양·우북평·요서·요동이, 서쪽으로 상곡·대군·안문이 있고, 남쪽으로 탁군의 易(이)·용성·범양·북신성·고안·탁현·양향·신창과 발해군의 안차를 얻었으니, 모두 연나라의 분야다. 낙랑과 현토도 마땅히 여기에 속한다.

(한서 권28, 지리지 하)

自鴈門、太原以東至遼陽,為燕代國。

안문과 태원에서 동쪽으로 요양에 이르기까지 연나라와 대나라를 이루었다.

(사기 권17, 한흥이래제후왕연표)

인용한 기록들이 서로 어긋나 보여 많은 독자가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렇더라도 먼저 소진열전의 기록만 단순하게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임호
루번
운중
구원
⇧
⇦ 연 ⇨
⇩
조선
요동
이수
호타
갈석(?)
안문(?)

여기에 이 글에서 인용한 기록과, 미처 인용하지 못한 기록까지 감안하여 더하고 빼면서 현존 지명과 함께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구원임호
계
조선
운중안문
대군
상곡북평
누번연
계
요서요양
요동
진이수
호타
조제
현대 지도 위 연나라 추정 위치와 계·요양 지명 이동 추정도
사기·한서에 기록된 연나라 주변 지명을 현대 지도에 대입한 가설적 위치도. 파란 원은 연의 추정 위치이고, 화살표는 옛 계와 옛 요양의 이름이 현 계현과 현 요양으로 옮겨졌다고 보는 필자의 추정이다. 각 위치는 확정된 것이 아니다.

요동과 요서를 확정하는 백제

요서를 차지하여 그 사실을 지나 사서에 남기게 한 백제 관련 기사를 인용해 본다.

百濟國,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其後高驪略有遼東,百濟略有遼西。百濟所治,謂之晉平郡晉平縣。

백제국은 본래 고리(고구리)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1천여 리에 있었다. 그 뒤 고리는 요동을, 백제는 요서를 경략하여 차지하였다. 백제가 다스린 곳은 진평군 진평현이라 한다.

(송서 권97, 열전 제57 이만)

百濟者,其先東夷有三韓國,一曰馬韓 ~ 百濟即其一也 ~ 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晉世句驪既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

백제는 그 선조가 동이로, 삼한국이 있었는데 하나는 마한이요 ~ 백제는 곧 그 (마한의) 한 나라였다. ~ 그 나라는 본래 구리(고구리)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晉(진)나라 때 구리가 요동을 경략하여 차지하자, 백제 또한 요서와 진평 두 군의 땅을 차지하고 스스로 백제군을 두었다.

(양서 권54, 열전 제48 제이 / 남사 권79, 열전 제69 이맥 하)

지난번 “우리나라 고대 국가는 어디 있었는가”에서 다루었듯, 고구리는 요동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면서도 북평·어양·상곡·태원을 정벌한 전례를 비롯하여 요동 서쪽의 영역을 차지한 사실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어느 사서에도 고구리가 요서에 영역을 차지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반면에 백제는 본래 요동의 동쪽에 자리하였다가, 이 세 사서에서 보듯 진나라 때 요서까지 차지하였다는 확실한 기록을 남겼다. 10월 13일 “지명은 땅에 붙어있다”에서 다룬 남제서의 지명 또한 백제의 영역이 결코 좁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이 기록은 백제가 대륙에서 매우 큰 영역을 확보하였음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높지만,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요동과 요서의 기준을 확정해 준다는 데 더 큰 가치가 있다. 지나 사서에는 한 문장 안에서도 남북의 위치를 뒤섞어 혼란스럽게 하는 기록이 제법 많지만, 이처럼 평범한 기록이 결정적 정보를 주기도 한다. 사서를 읽는 기쁨이 여기에 있다.

맺음말

요수와 요하가 사서에서 어떻게 구분되는지 알아보려고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등장 횟수 세기가 요동과 요서를 다루는 연구로 이어졌다. 물론 그 바탕에는 우리 역사가 왜 만주에 갇혀 있는가 하는 반발심이 있었다. 통설의 역사가 말하는 삼국의 영역은 우리의 사고를 이 巨串[거곶; 필자가 반도라는 말을 피하려고 만든 낱말]과 만주에 가두어 놓고 진취적인 기상을 꺾어 왔다.

이제 요동을 요사 이후에나 등장하는 ‘요하의 동쪽’으로 보는 개념을 깨고, 대륙으로 우리 역사의 영역을 넓혀 보기를 바란다. 이에 확신을 갖기 위해 ‘요동과 요서’에 관한 글을 몇 차례 더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모쪼록 독자 여러분이 스스로 나서서 통설의 사학을 깨부수는 연구에 직접 참여하시기를 부탁드린다.

참고 사료 및 자료

‘梁書’ 권54, 列傳 제48 諸夷 高句驪·百濟.
‘南史’ 권79, 列傳 제69 夷貊 下.
‘宋書’ 권97, 列傳 제57 夷蠻.
‘史記’ 권6 秦始皇本紀, 권17 漢興以來諸侯王年表, 권69 蘇秦列傳.
‘漢書’ 권28 地理志 下.
‘隋書’ 권4 煬帝紀.
‘孫子’ 軍爭篇.
遼(요) 관련 지명 출현 횟수: ‘史記’부터 ‘淸史稿’까지 26종 사서 원문 검색, 필자 집계.
경주 호우총 출토 청동 호우 명문.
평양성 석각(1913년 내성 동벽 출토).
1936년 ‘山西省’ 지도, 1137년 석각 ‘華夷圖’.
연나라 주변 지명 도식과 현대지도 대조도: 필자 연구 자료.

korecult

korecult
금속공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Operations Management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반평생 사업가로 활동하며 기술·생산·경영 현장을 경험했고, 한국정신과학학회 창립에 참여해 총무이사와 부회장을 역임했다. 이후 한국사와 동아시아 고대사를 사료와 유물에 근거해 다시 살피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지명·사서·판본·유물을 중심으로 통설의 근거(? 오류)를 원문에서 확인하고, 그 결과를 일반 독자가 이해하기 쉬운 글로 풀어낸다. 아울러 역사 자료의 수집·번역·분석과 글쓰기 과정에서 활용한 AI와 디지털 도구의 경험도 가끔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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